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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되찾은지 70년이 지났다. 오천년의 한반도 역사 중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통한의 36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민족의 자존감이 사정없이 짓밟히는 동안 급기야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당 부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세월이었다.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됐지만 회복되지 못한 부분이 사회 곳곳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은 자주적 해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었고, 경제적 급성장을 이뤄냈지만 동시에 형제를 잃었으며 민족의 자주성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광복 70년, 나라를 찾은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자주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광복을 위한 여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을 꿈꾸던 우리 민족은 기뻐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시작된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36년에 걸쳐 국권을 침탈하고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에 이른다. 이에 선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외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사흘 뒤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다. 일본 천황은 엿새만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사진=이강) |
기뻐하고 또 슬퍼하여라, 대한국민이여
마침내 우리 민족이 꿈에도 그리던 해방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기뻤다. 온 백성들은 거리로 나와 대한민국 만세, 대한국민 만세를 외쳤다. 백성들은 해방의 날이 찾아올 거라 차마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다 큰 어른들이 거리로 나와 울며불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함성을 질렀고, 지금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었을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마음껏 기쁨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비와 어미, 형과 누나를 위한 통곡의 눈물도 마음껏 흘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민족의 독립은 수많은 선혈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타의에 의해 이뤄졌다.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민족 전체의 자주적 의지로 이루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70년이 흘렀다. 옛 서대문형무소가 지리하고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을 찾아간다. 철거공사를 알리고 있는 독립문 고가 아래 독립문 사거리를 지나면 공원의 입구가 나온다. 바로 눈 앞에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이 나타난다. 중국에 대한 사대를 상징하는 조선조 영은문을 헐어내고 세운 자주독립의 상징이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성금을 모아 세운 건축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드골 광장 중앙에 위치한 개선문을 본따 서재필이 스케치했고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다. 독립문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본래 영은문이 있던 곳보다 좀더 앞쪽에 세워졌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쪽에는 한문으로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외부로 나가는 쪽에는 한글로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오기 위해 사용했던 유일한 육로인 무악재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다. 영은문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청일전쟁 당시 일제가 불 질렀을 때의 그을음이 남아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화강석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그 뒷편에는 서재필 선생의 동상이 굳건히 서서 독립문을 지켜보고 있고, 그 왼편으로 순국선열 위패가 모셔진 독립공원 현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헌화대를 지나 사당 입구로 들어서면 순국선열 283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위패들 가운데 안중근·이봉창·유관순 등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 이름도 보인다. 현재 현충사로 쓰이는 건물은 본래 구한말 독립협회의 독립관(옛 모화관)을 복원해 1997년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 모신 순국선열은 일제 강점기에 전투와 고문 등으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독립운동가를 지칭한다.
△독립문(사진=이강) |
부끄러움을 잊지말아라, 대한민국이여
아이와 산책을 즐기는 부모들과 하릴없이 그늘에 앉은 노인들, 그리고 비둘기의 무리가 쓸쓸하고 한적한 공원에서 노닌다. 순국선열추념탑를 지나 서대문역사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옛 서대문형무소로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감금되고 고문 당한 쓰라린 역사를 안고 있는 장소다. 형무소 높은 담장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가 15명의 벽화를 그려놓았다.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하기 시작한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을 지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꾼다. 일제 강점기 때 이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가 수감되어 있었다. 때문에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구금되어 악형에 시달린 끝에 바로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33인의 민족대표를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시민, 학생들을 투옥하는 과정에서 수용인원을 초과해 수감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로 이름을 바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바뀐 이후에는 많은 민주지사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1987년 의왕시로 구치소가 이전되면서,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서대문형무소역사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벽화가 걸려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사진=이강) |
관람객들은 독립운동가들의 벽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입구로 들어선다. 광복절을 며칠 앞둔 때여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아빠나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들, 친구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발걸음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간혹 외국인의 모습도 눈에 띈다. 관람객들은 붉은 색 벽돌의 형무소 건물들을 바라보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위압적이면서도 처연한 풍경에 모두 할 말을 잃은 모습이다. 관람객들은 줄을 지어 일제 때 지어진 옥사와 작업장, 전시관 등을 둘러본다. 현재 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안과청사의 1, 2층에는 서대문형무소 관련 자료와 도서관, 기획전시실이 있다. 주요 전시물은 형무소 시절 사용됐던 수감 시설과 역사 관련 자료들이다.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지하 감옥과 사형장, 고문실 등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 관람객이 직접 감옥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옥중 생활실이 전시관 안에 마련돼 있다. 옥사 내에서 문이 열린 감옥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으며, 고문체험, 재판체험, 사형체험 등을 해볼 수 있다. 옥사를 둘러보고 외부 광장으로 나오니, 광복절을 앞두고 옥사에 게양된 대형 태극기와 커다란 미루나무가 눈에 띈다. 커다란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학생들의 모습이 의연하고도 믿음직스럽다. 광장에 선 한 그루 미루나무는 사형장이 건립되던 1925년 식재된 나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을 원통해하며 나무를 잡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나병환자들만 모아 가두었다는 나병사와 사형장, 몰래 시체를 내다 버리던 시구문까지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니 멀리 인왕산으로 해가 저문다.
원문: 뉴스토마토
이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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