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는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의 기고로 진행됩니다. 박성현 연구원은 최근까지 프랑스에서 고은 시인의 시세계를 연구하고 전파하다 한국에 이제 막 돌아온 ‘고은 전문가’입니다. 1989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97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미학박사를 받았으며,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지난해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고은, 한국의 시와 역사: 만인보의 세계>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 고은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에 담겨 있는 민중의 모습과 함께 근현대 한국사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최근 한국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지난 12월30일 이래 4주째, 최근 들어 영하 10~15도를 오가는 한파 속에서 새우잠을 자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져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노숙을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그 하나이고, 1월14일 4.19민주묘역을 참배한 현장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언급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중민(中民)이론의 사회학자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의 발언이 다른 하나이다. 얼핏 별개로 보이는 이 이슈들이 하나의 궤도에 있는 것은 우리의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현재적 과제이고 역사의 환부가 치유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50년 전의 기억
지난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양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고 전격적으로 합의내용을 발표한 것은, 저 1960년대, 국민들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던 역사를 상기시킨다. 문제의 당사자인 피해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한국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 설립에 일본정부의 돈 10억엔을 받는 대신, 일본의 합의 사항 이행을 전제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일본정부와 공동으로 선언했다. 그 결과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 이전 문제도 관련단체와 협의해갈 것이고, (역시 일본의 조치 이행을 전제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상호비판을 자제할 것이라고도 천명했다.
1964년 한일외교 반대투쟁이 6월3일 수만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로 확산되자 박정희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국민의 의견을 무시한 채 강행한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달러의 차관을 지원받는 대가로 박정희정부는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 한국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의 4대 부속 협정 중 하나인 ‘어업에 관한 협정’을 조인함으로써, 1952년 1월18일 한반도의 어업보호를 위해 이승만이 선포한 ‘평화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독도 인근의 공동어로구역 설정과 더불어 평화선 안쪽에 있던 독도가 양국 간 분쟁의 씨앗으로 재점화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만다.
또한,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의 제2조 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해놓아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켜왔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제4조(a)는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 즉 식민 독립에 따른 재산관계의 정리를 언급하고 있다.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이 회담에 한국은 전승국으로 초대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전쟁배상도 받지 못했다.) 50년 전 한일협정(1965년 6월22일)이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내용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음으로써 야기한 분란을 상기할 때, 이번 한일외교회담(2015년 12월28일)에서 박근혜정부가 10억엔에 동의한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 또 얼마나 우리를 괴롭힐지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일본정부가 통감하는 책임이 ‘법적’, ‘도덕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 것인지, 일본 외무상이 대신 전한 아베총리의 사죄가 그 자신의 입으로부터는 왜 나오지 않는지, 늘 그렇듯이 의아할 뿐이다.
소년 고은의 기억
<만인보>의 시인은 1933년에 태어나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어린 소년 고은이 체험한 식민지 민중의 일상은 수십 년 후 시적 회고로 살아난다. "얼굴에 참깨 들깨 쏟아져 / 주근깨 자욱한데 / 그래도 눈썹 좋고 눈동자 좋아 / 산들바람 일었는데 / 물에 떨어진 그림자하구선 / 천하절색이었는데 / 일제 말기 아주까리 열매 따다 바치다가 / 머리에 히노마루 띠 매고 / 정신대 되어 떠났다"(‘만순이’, 2권).
‘정신대(挺身隊)’는 원래, 그 한자가 보여주듯이, ‘국가에 자발적으로 몸을 바치는 부대’를 뜻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일본 정부가 1930년대 초부터 조직적으로 운영해온 반면, 남녀 ‘정신대’는 전쟁 시기 일본군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편제되었다. 일제는 또한, 전쟁 말기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여자근로정신대’를 결성해 군수공장으로 보내게 된다.
"비행기 꼬랑지 만드는 공장에 돈 벌러 간다고 / 미제부락 애국부인단 여편네가 데려“간 만순이가 ”일장기 날리며“ 떠나간 후, ”만순이네 집에는 / 허허 면장이 보낸 청주 한 병과 / 쌀 배급표 한 장이 왔다 / 허허 이 무슨 팔자 고치는 판인가“(앞의 시). 그러나 그렇게 떠나간 만순이는 ”해방되어 다 돌아와도“, ”백도라지꽃 피“고 ”하루 내내 죽어라고 / 쓰르라미 우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다. 만순이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되어 근로정신대의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 ‘정신대’의 이름으로 떠났으나 일본군 ‘위안부’의 운명을 강요받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죽음보다 깊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고은 시인 육필원고 ‘만순이’ 초안. 사진=고은재단
일제강점기 말에 대한 소년 고은의 기억은 <만인보>의 곳곳에 묻어난다. "우리는 3학년 1학기까지 / 일본이 망할 때까지 / 아침마다 / 동남쪽 일본 궁성 쪽에 대고 / 동방요배로 절을 했다“(‘김일태란 놈’, 2권). 어느 날 ”담임선생(이) 출장“을 가자, ”원당리 홍기양이하고 / 개사리 히로따 이찌로오하고 / 동방요배 때려치우고 / 시시덕거렸는데 / 이것을 미제 김일태가 고자질했다 / 일본인 교장 아베 쯔또무 호랑이 가로되 / 두 놈 당장 무기정학 처분이거니와 / 그 시시덕거리는 걸 본 놈도 / 그걸 보느라고 / 동방요배 안 한 것이니 / 네놈도 벌받아 / 일주일 동안 변소 소제 맡아라! / 미제 김일태란 놈 / 고자질해서 / 운동화 배급 타려고 했는데 / 운동화 대신 / 변소 소제 보리밥똥 지지랑물 설사똥 치우느라 / 그 고자질 그 구린내에"(앞의 시).
이 개구장이 소년들의 일상이 보여주는 식민지시대 교육의 단면은 고은시인 자신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아베 쯔또무 교장 / 뚱그런 안경에 고초당초같이 매서운 사람입니다 / … / 2학년 때 수신시간에 / 장차 너희들 뭐가 될래 물었습니다 / 아이들은 / 대일본제국 육군대장이 되겠습니다 / … / 비행기공장 직공이 되어 / 비행기 만들어 / 미영귀축을 이기겠습니다 할 때 / 아베 교장 나더러 대답해보라 했습니다 / 나는 벌떡 일어나서 / 천황폐하가 되겠습니다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 청천벽력이 떨어졌습니다 / 너는 만세일계 천황폐하를 / 황공하옵게도 모독했다 네놈은 당장 퇴학이다 / 이 말에 나는 주저앉아버렸습니다"(‘아베 교장’, 3권).
고은 시인 육필원고 ‘김일태란 놈’ 초안. 사진=고은재단
담임선생과 아버지가 빌어서 "간신히 퇴학은 면한 대신“ 시인은 “몇달 동안 학교 실습지 썩은 보릿단 헤쳐 / 쓸 만한 보리(를) 가려내는 벌을 받”게 된다. “날마다 … 썩은 냄새 속에 갇혀” “땡볕 아래서나 빗속에서나” “이 세상에서 … 혼자임을 깨달”은 소년 고은이 “그 몇달 벌 마친 뒤 수신시간에” 다시 만난 교장의 모습을 묘사하는 어조에는 뒤바뀐 정세가 가져다 준 설렘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아베 교장은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 대일본제국이 이겨 / 장차 너희들 반도인은 만주와 중국 가서 / 높고 높은 벼슬 한다고 말했습니다 / B-29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빛 사발비행기가 왔습니다 / 교장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 저것이 귀축이다 저것이 적이라고 겁도 없이 말했습니다 / 그러나 아베 교장의 어깨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 큰 소리가 작아지며 끝내는 혼자의 넋두리였습니다 / 그 뒤 8·15가 왔습니다. 그는 울며 떠났습니다”(앞의 시).
징용·징발의 시대
만순이가 “일제 말기 아주까리 열매(를) 따다 바”친 것은 비행기 기름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어린 고은시인을 비롯해 학교의 모든 어린이들이 해야 했던 일로, 시인이 소설 형식으로 쓴 자서전 연작의 한 권(<황토의 아들>)을 보면, ‘미영귀축(米英鬼畜)’을 격멸할 비행기 기름을 만드는 데 쓰일 전나무 열매와 아주까리 열매를 따느라 학교에 가서도 수업을 거의 할 수 없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전쟁 말기의 분위기이다. 학교 부근에는 학교전용의 방공호들을 파고, 마을주민들은 부역이 많아졌으며, 식량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몰수되었고, 놋그릇, 쇠붙이 따위는 요강이든 수저든 다 징발되었다는 것, 그리고 정신대와 징용―일본, 만주, 동남아, 남양군도, 자바 등―으로 끌려간 마을사람들을 시인은 회고한다.
전시체제 하의 물자부족, 식량부족, 징용, 징발의 일상은 여러 시들에서 드러나는데, 남편의 제사를 지내는 수레기댁의 모습도 그 중 하나이다. “개구리 방죽 / 개구리만 있고 다 죽은 세상이구나 / 개구리소리에 / 수레기댁 우는 소리 있으나마나 / 오늘밤 영감 떠난 지 10년 제삿날 / 보리 한 되 들어와 / 보리밥에 수저 꽂고 울고 있구나 / 놋수저 몽댕이마저 걷어갔으니 / 나무수저 꽂고 울고 있구나”(‘수레기댁’, 1권). 이런 징발은 “방앗간에다가 / 산지사방 장리쌀에다가 / 꿩 먹고 알 먹는 알부자”인, 그러나 “인색하기가 / 이마빼기 찔러도 피 한 방울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없”는 관묵이 아저씨네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어서, “일제말 놋그릇 다 내놔야 할 때 / 그 집에서 산더미 놋그릇 나왔지요 다 빼앗겼지요”라고 소년은 노래한다(‘관묵이 아저씨’, 1권).
그러나 일제말의 곤곤한 현실도 <만인보>에서 그려질 때는 따뜻한 온기에 싸여있는데 이는 정감 있는 각각의 인물들 덕일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 으레 한마디 걸어야 직성 풀리는“, ”우리 마을 나가는 방죽 다리 앞” 수레기댁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방죽물 비린 바람 맞고” 학교 가는 아이들에게 가로되, “야들아 / 학교 가서 가만히 앉아 있거라 / 그래야 배 안 꺼진다 / 밥 먹은 것 다 꺼져 버리면 / 힘 빠져 버리면 / 그게 어디 사람이더냐 / 죽은 누에지 / 두잠 석잠 다 자고 죽은 누에지”(‘다릿집’, 2권).
인구에 종종 회자·인용되는 역사의 나선형 발전은, 오래전 시민사회의 역사를 구성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에 의해 이미 언급되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완벽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에 도달하지는 못한 채(그래서 역사는 “이상적”이라 한다) 깨지거나 상대적으로 더 원시적인 조건으로 회귀하는(break or return, ricorso) 것에 의해 중단된다. 이 반전으로부터, 역사는 자신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이 이미 이룩한, 되돌릴 수 없게 더 높은 지점으로부터이다. 비코로부터 한참 후,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 대한 리뷰(1859)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종종 비약적으로 그리고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역사과정이 과거로 회귀하고 반복되는 듯이 보여도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 이미 한 단계 높은 지점이라면 아직은, 아니 항상,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원문: 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