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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⑤명절, 그리고 일상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⑤명절, 그리고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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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는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의 기고로 진행됩니다. 박성현 연구원은 최근까지 프랑스에서 고은 시인의 시세계를 연구하고 전파하다 한국에 이제 막 돌아온 ‘고은 전문가’입니다. 1989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97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미학박사를 받았으며,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지난해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고은, 한국의 시와 역사: 만인보의 세계>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 고은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에 담겨 있는 민중의 모습과 함께 근현대 한국사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설이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아마도 이번 주말부터 연례행사인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명절을 즐기면 좋겠으나, 누군가는 집안의 즐거운 명절을 준비하느라 과로와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고, 누군가는 체불임금으로 인해 암울한 명절을 앞두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평소와 같이 연탄을 아껴 때며 홀로 고적한 날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70여년 전, 1940년대 <만인보>의 사람들은 어떤 명절,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까?

 
역사와 함께 한 ‘설’의 운명
 
‘설’의 명칭과 위상 변화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895년 명성황후를 참살한 일본은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이른바 ‘을미개혁’을 단행케 하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태양력의 사용이다. 이에 따라 1896년 1월1일부터 양력이 사용되었지만, 음력으로 지내는 설날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일제강점기에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고은시인의 자서전 <황토의 아들>에도 일본 순사가 “음력 설을 쇠지 못하게 떡방아 찧는 데다 흙을 뿌려 버리거나 이미 만들어진 가래떡을 빼앗아다 돼지우리에 쏟아부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고은 전집> 23권, 13면).

 

 

△정원대보름에 한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달집 태우기가 진행되고 있다.(사진=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았던 ‘음력 설’은 해방 이후에도 정권에 의해 여전히 푸대접을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인 설이 구식이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력으로 설을 지내야 국제무역통상에도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 내내 일제의 유제 그대로 이른바 ‘신정’이 강조되고 설은 ‘구정’으로 폄하되어 국민들은 음력, 양력으로 두 번 설을 쇠게 된다. 이렇게 실질적으로는 이중과세(過歲)의 문화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양력 설’이 의무였으나, 본래의 설날은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혹은 괴상한 이름의 ‘1일 공휴일’로 부활되어 ‘양력 설’과 병행되게 된다. 설날이 완전히 제 이름과 제 자리를 회복한 것은 1989년 음력 1월1일부터이다. 이로부터 설날은 3일 연휴로, 양력 1월1일은 1999년부터 1일 공휴일로 바뀌게 된다.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
 

설 명절은 전통적으로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 계속되었는데, 새해 첫날의 시작과 첫 달 첫 만월의 풍요로움이 갖는 상징성은 농경문화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 더위 / 내 더위 / 대보름 식전바람 더위 팔고 신나지 / 동네 아이들 신나지 // 그러나 어른들은 / 대보름 지나면 싫지 / 설날부터 대보름까지는 / 어영부영 놀고 / 마을에서 / 징소리 / 장구소리 그치지 않았지 // 대보름 지나면 싫지 / 논에 거름 부리러 / 거름 지고 나가야지 / 한삽 한삽 언 땅 파 / 뼈빠지게 객토해야지”(‘대보름’, 5권). 정월 대보름을 기점으로 농한기를 끝내고 다시 새로운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농민의 심정이 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농사란 게 워낙 일이 많고 고되다보니 “해 뜨면 / 해가 원수”라서 “밀린 일(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그래서 대보름날 밤에는 / 영락없이 / … / 술 먹다가 / 싸움 씨 뿌려 / 멱살잡이 싸움 벌어지지 // 그런 싸움 맡아놓은 / 새터 김상술이 / … // 싸우고 나서 / 그렇게도 무색한 상술이 / 싸우고 난 뒤에는 / 안 들어 줄 일도 / 순순히 들어 주지 / 중뜸 재환이 마누라 옹색하면 / 상술이 싸움 뒤에 / 상술이한테 돈 꾸어오지”(앞의 시).

 

△한해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며 들판의 병해충을 잡는 세시풍속 쥐불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향토문화전자대전)

 

 

명절에 같이 모여 잘 놀다가도 싸움 한 판쯤 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농촌이나 도시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인간사가 다 거기서 거기라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싸움 뒤 무색해 “안 들어 줄 일도 / 순순히 들어 주”는 심성은 요즘 쉽게 볼 수 없을 듯하다.

 
설 명절의 끝자락을 풍성하게 마무리하는 대보름은 너도나도 인심이 후한 날이다.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 밥손님 올 줄 알고 / 미리 오곡밥 / 질경이나물 한 가지 /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놓는다 /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다”(‘대보름날’, 1권). 동구 밖을 나가던 거지가 들어오던 다른 거지를 만나 반기며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 그 불에 몸 녹이며 /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니 “두 거지 밥 한입 가득히 웃다가 목멘다”(앞의 시).
 
사실 <만인보>에는 설날보다 정월대보름을 배경으로 한 시들이 더 많은데, 이는 아마도 대보름날이 농사의 시작일인지라, 저자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고향마을의 풍경 속에도 새로운 농사를 준비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이 날의 세시풍속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시들이 노래하듯이, 식전 더위부터 팔기 시작해, 모든 곡식이 풍작이기를 기원하며 오곡밥을 먹고, 가난한 식민지 백성인지라 아홉 가지 나물은 못 먹지만 묵은 나물도 먹고, “징소리 / 장구소리 그치지 않”게 지신을 밟아 잡귀를 쫓고 땅의 신령께 인사를 올리며 풍년과 복을 기원한다.
 
밤에는 논둑, 밭둑에 불을 놓아 쥐와 해충을 방지하고 탄 잡초를 오는 봄 새싹의 거름으로 쓰기 위한 쥐불놀이를 하는데, 이 쥐불놀이의 불빛 속에는 소년 고은의 설레는 마음이 어른거리고 있다. “대보름 전날 밤 / 하필 구름 자옥한 밤이라 / 달 코빼기도 안 나온 밤이라 / 그런 날 갈뫼 똘가에 나가 / 길고 긴 둑에 불 놓기 좋은 밤이라 / …”(‘쥐불’, 5권). “그렇게도 새롭고 / 그렇게도 한없는 밤”, 여기저기 놓은 쥐불의 “불빛에 비로소 살아나는 얼굴들”이 꿈 같은 밤 속에, 열여섯, 열일곱으로 보일만큼 큰 열네 살 소녀 타마꼬도 있어 “문득 타마꼬야 부르려다가 / 타마꼬! 하고 / 떨리며 불렀다 / 그 타마꼬 어둠과 불빛 먹으며 / 웃는 모습 달더라 다디달더라”. 달려온 오빠 기철이 꾸짖으며 데려가자 “타마꼬 눈물 흘리며 /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 따라가고 싶었다 / 따라가며 달래고 싶었다 / 그러나 굳센 타마꼬 틀림없이 혼자 가리라 // 타마꼬 아버지는 형사한테 쫓기는 몸이라 / 대보름날 명절에도 돌아올 줄 모르는데”(앞의 시).
 
배고픈 일상을 견디는 흥취
 
그러나 명절이 지나가면 자기 식솔들 먹을 것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지라 일상의 풍경은 탁발승이나 걸인들에게도 녹록할 수가 없다. “칠성암 동냥중과 / 미제 다리 밑 거지는 단골이라 / 퇴박맞아도 그냥 순하게 물러나지만 / 두어 달 만에 한 번씩 들이닥치는 / 장타령꾼 두 각설이는 / 줄 양식 없다 밥 한 숟갈 없다 해도 / 허어 그 무슨 막말이오 / 작년에 왔던 각설이 / 금년에 왔던 각설이 / 죽지도 않고 이렇게 왔는데 / 그 무슨 손님 대접이 덜 구워진 감자마냥 못되었소그려 / 일자나 한자 들어보소 / … / 이렇게 사설이 무명 한 필로 펼쳐지는데 / 그들의 만 조각 누더기에 배짱 하나 썩 좋아서 / 씨구씨구 들어간다 참기름 발라 들어간다”(‘장타령’, 1권). 동네 아이들도 신이 나 “함께 발 돋우고 흥 돋”우니 각설이 왈, “이러고도 쌀 안 내놔 보리 안 내놔 밥 안 내놔 / 안 내놓으려면 두루마기 입고 나와 큰절이라도 하소 / 금 나와라 뚝딱”(앞의 시).

고은 시인 육필원고 <장타령> 초안. 사진/고은재단


 

한편, “1년 열두 달 가야 / 초파일에도 / 칠월 백중날에도 / 불공 한 자루 그럴듯한 것 안 들어오”는 칠성암의 주지는 “나운리 미룡리 선제리까지 / 누가 병들었나 수소문하여 / 숨 꼴칵 넘어가는 날 영락없이 달려와 / 나무아미타불 불러”대 “칠성암 법당 부처님 밥 먹이”는 처지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속의 할 도리를 다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다음 구절에 익살스럽게 묘사되어있다. “그런데 / 칠성암 주지 조봉구 스님 / 한번 마음에 봄바람 들면 / 보릿고개 못 넘기는 사람 / 보리가마니깨나 넙죽 내어주지 / 두말없이 내어주지 / 오거리 술집 주모 병났을 때는 / 구암병원 입원비 다 물어주고 / 참 내 오거리 술깨나 먹은 죄 / 어쩌다가 그년 살보시깨나 받은 죄 / 이번에 절반은 갚은 셈이지 낄낄낄낄”(‘칠성암 주지’, 3권).

 
<만인보>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이유는 아마도 ‘장타령’같이 펼쳐지는 시행들이 우리 가락의 운율과 해학 속에 삶의 리얼리티를 담아낸 때문일 것이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율이 높아지는 요즘, 수년째 OECD 국가들 중 자살율 1위라는 기록을 유지하는 우리가 함께 나누어 덜 배고플 수 있었던 70여년 전의 명절을 회복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원문: 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