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②‘미제 방죽’의 기억-“연꽃 보러 왔네”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②‘미제 방죽’의 기억-“연꽃 보러 왔네”

 

http://coverage.kr/sub.php?code=article&category=12&mode=view&board_num=313

 

 

병신년(丙申年)을 맞아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는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의 기고로 진행됩니다. 박성현 연구원은 최근까지 프랑스에서 고은 시인의 시세계를 연구하고 전파하다 한국에 이제 막 돌아온 ‘고은 전문가’입니다. 1989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97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미학박사를 받았으며,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지난해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고은, 한국의 시와 역사: 만인보의 세계>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 고은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에 담겨 있는 민중의 모습과 함께 근현대 한국사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몇 년 전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서 군산을 여행지로 삼아 그 곳의 역사와 풍물, 여기저기 의미있는 장소들을 소개한 후 전국적인 관광지로 부상한 바 있다. 방송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인데, 그런 매개를 통해 국민들이 한국사에 더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대입시험에 국사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되었을 때 얼마나 통탄했던가. 학교에서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배우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역사를 모르는 국민의 미래가 밝을 것 같지는 않다. 전에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식민지 도시 군산의 역사를 한 수 배웠다면, 오늘 우리 아이들과 함께 시를 읽으면서 더 풍부한 감성으로 역사를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미룡저수지의 역사

 

<만인보>를 읽어가다 보면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어느덧 애정이 생겨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시인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내가 마치 그들을 만났거나 알았던 사람들 같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 역시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들에 나오는 지명들도 친숙해져, <만인보>를 읽고 처음 군산에 갔을 때 마치 수십 년 만에 돌아와―마을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 일제 말이라―바뀐 모습을 보는 듯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제는 아파트들이 들어서 옛 마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몇몇 역사적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예를 들어 은파저수지로 흔히 알려진 미룡저수지가 그것인데, <만인보>에는 ‘미제 방죽’으로 등장한다. ‘미룡저수지’라는 이름은 한국농어촌공사가 현재 사용하는 공식적 명칭으로, 군산시 미룡동, 나운동, 지곡동 일대에 걸쳐 있는 이 저수지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룡(미제)저수지에 대한 최초의 역사기록은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제34권 전라도 옥구현 산천에 대한 설명을 보면, “미제지는 현의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1만 9백 10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축조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측되는 만큼 백성과 함께 해 온 역사가 깊은 셈이다.

 

△미제지(현 은파저수지)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 속 지도. 미제지는 중종 25년(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는 방죽으로, 우리말로 ‘쌀뭍방죽’이라 한다.(사진=고은재단)

 

<만인보>의 저자인 고은 시인은, 1933년 당시 명칭으로,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태어나 이 미제지를 늘 보며 자랐으니 <만인보>의 마을사람들을 그린 시에도 ‘미제’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들이 많다. 미제(米堤)가 우리말로는 ‘쌀뭍 방죽’이라는 뜻이고, 미면(米面) 미룡리(米龍里)라는 지역명이 여기가 쌀의 고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 일제가 군산을 1899년 강제로 개항시키고 이후 식민지 수탈지로서 왜곡된 성장을 겪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쌀 생산의 요람인 호남평야가 있고 그 쌀을 실어 나를 뱃길인 금강이 서해로 닿아있으니, 군산은 조선시대 때 이미 군산창과 군산포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객주의 활동도 활발하던 곳이었다. 조선 초기 옥구현 북면에 설치된 군산창은 이후 전라북도 7개현의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을 한양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모아두는 조운창고가 되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군산도(선유도)에 있던 수군부대인 군산진이 세종때 옥구현 북면의 진포로 이전되어 수군병영이 된다. 이로 인해 진포는 군산으로, 군산도는 고군산으로 불리게 된다.

 

사행이 아저씨의 주낙배 그리고 연꽃

 

시인의 소년 시절 기억 속에는 고요하고 너른 미제지 물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과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키다리 사행이 아저씨의 모습이 남아 있다. “미제 방죽 물 위에 / 오직 한 사람 / 키다리 사행이 아저씨 / 주낙배 주낙 걷는다”(‘사행이 아저씨’, 1권). 그러나 이 고요한 그림의 한 쪽 편에는 비보를 가지고 물가로 뛰어오는 “사행이 아들 칠성이”의 모습도 있다. “너무 멀어서 불러도 소용없”는 소리로 소년이 외친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죽었어 눈 뜨고 죽었어”. <만인보>의 시인은 이렇듯, 미제지를 배경으로 노동(뱃일)이라는 삶의 행위 옆에 죽음이라는 또 다른 삶의 행위를 나란히 놓아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키는데,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저자의 철학적 사유를 엿보게 하고 물이 갖는 죽음(그리고 재생)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 영영 끊어져 잔물결 인다”.

 

△은파저수지(옛 미제지) 모습.(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그림 안에 물 위에서 일하는 사행이 아저씨와 달려오는 아들 칠성이가 있다면, 그 옆에 놓일 만한 또 하나의 그림에는 역시 물 위의 사행이 아저씨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사람 상묵이 아저씨와 그의 소도 함께 그려져 있다. “미제 방죽 그 넓은 물 / 오직 혼자 배 저어 / 주낙 놓아 / 잉어도 가물치도 짜가사리도 건지는데 / 마구 건지는 게 아니라 / 조금씩 건지는데 / 그 사람이 사행이 아저씨라 / 장대키에 말 없으니 / … / 한나절이고 / 하루고 물 위에 있는데 / 그 사행이 아저씨의 아버님 / 슬슬 물가에 나들이 나오셨다 / … / 마침 쟁기질하고 가던 상묵이 아저씨가 / 소하고 사람하고 잠깐 서서 / 아드님 보러 나오셨는가유 하고 인사드리니 / 아니네 / 연꽃 보러 왔네 / 내년에 못 볼 테니 보러 왔네”(‘사행이 아저씨의 아버지’, 3권).

 

이 시절만 해도 “미제 방죽가”에는 “연잎(이) 자욱”하고 그 잎들 사이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고 시인은 기억한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직접 드러내기에는 쑥스러웠을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사행이 아저씨 아버지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 마음을 상묵이 아저씨가 알고, 저자가 알고 독자가 안다. “고요하구나 / 연꽃도 보고 / 내 자식 늙은 자식 고기 건지는 것도 / 멀리 보고 / 이 세상의 기쁨 어디 한 가지뿐인가 / 삼재팔난만 이것저것 마구 몰려오는 것 아니라 / 기쁨도 두 기쁨 세 기쁨 새끼 쳐 / 한 사람에게 과하지 / 내년에 못 볼 연꽃 / 한평생에 과하지”(앞의 시). 이 역시 고은시인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고 그 철학적 사유는 <만인보>의 많은 시들이 갖는 매력이다. 연꽃을 볼 때 자식도 은근히 보는 기쁨, 내년에 못 보아도 올해에 연꽃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족한 넉넉한 마음이, ‘삼재팔난’이 찾아오는 인생에서도, 더욱이 평소보다 더욱 곤곤한 일상을 살아야했던 일제치하의 삶에서도, 민중이 긍정성과 웃음을 잃지 않는 힘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도 “여름마다” / “비 온 뒤 피던 연꽃”들이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자취를 감추게 된다. “미제 방죽 연꽃 다 떠나가버리고 / 그냥 맨물만 남아 가득할 때 / … / 거기에 돌 하나 던져 / 툼벙! 물소리 난 뒤 / 미제 아이들 / 용둔리 아이들 / 뚝길에 모여 / 연꽃 와라 연꽃 와라 연꽃 와라 / 외쳐댔지만 / 1945년 이래 / 비 오는 날 / 연잎사귀로 우산 받던 날 오지 않았다 / … / 그리고 6·25가 왔다 / 사람들이 서로 죽였다 / 우익이여 좌익이여”(‘미제 방죽’, 3권). 한국전쟁의 골육상잔이 식민지 백성이어도 순정을 잃지 않았던 시절을 능가한 셈이다.

 

미제 방죽과 세 바위 설화

 

미제 방죽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세 바위 설화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미제 방죽 큰 물자리에 큰 부자가 살았다지요 / 욕심 많고 소작꾼들 못살게 굴고 / 머슴 새경도 십 년이나 미루고 안 내주었다지요 / 하루는 스님이 와서 시주 염불하는데 / 부자 영감 쌀 한 홉 대신 쇠똥을 쌀자루에 처쟁여 주었다지요 / 이 못된 짓 보고 있던 그 집 마나님 / 떠나는 중 몰래 불러 쌀 주며 / 영감 잘못 용서해달라 빌었다지요”(‘아기바위 개바위’, 2권). 이윽고, 여러 설화나 신화들에 흔히 등장하는 모티프이듯이, 스님이 다음날 아침 “집을 떠나 산으로 달아나되 / 무슨 소리 나도 뒤돌아보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마나님은 아기 업고 울며불며 산으로 가던 중 / 천지 진동하는 소리 듣고서 / 그만 스님의 당부 잊어버리고 뒤돌아다보”게 된다. 이 때 “대궐 같은 집 간데없고 큰물이 고여 방죽”이 된 게 미제 방죽이란 것이다. “마나님은 놀라서 소리지르는 찰나 / 어린아이와 함께 돌이 되어버렸다지요 / 그래서 백두개 지나면 / 진고개 어미바위에 아기바위가 얹혀 있어요 / 그 건너 백두개고개에는 개가 따라가다 바위 되어 / 개바위가 있어서 오가는 사람 쉬어가지요 / 손때 묻어 개바위 반들반들하지요 / 군산항 뱃고동소리 거기까지 날 저물어 들려오지요”(‘아기바위 개바위’, 2권).

 

아기/어미바위와 개바위, 그리고 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바위―잘못 인도한 스님이 되었다는―까지 포함해 세 바위는 택지개발과 관광지 조성으로 인해 원래 있던 자기 자리를 떠나 나운동의 한 아파트 내 공원으로 옮겨지고, 이후 은파유원지로 다시 옮겨져 모여있게 되었는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바위들을 원래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면서 미제지와 세 바위 사이의 길들을 연결해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설화를 직접 느껴보게 하는 것은 어땠을까? 저수지 이름이 미제에서 은파로 바뀐 계기는 유원지를 구상한 사업가가 영업허가서를 제출할 때 미제라는 이름대신 자신의 아버지 호인 ‘은파’를 써내어 그대로 허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제 방죽이 ‘은빛 물결’로 아름답게 반짝이니 그 역시 좋은 이름이겠으나 명칭에서 역사성이 사라진 것 역시 아쉬운 일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원문: 뉴스토마토